스탠딩 뮤지컬 <화순1946> 공연을 다시 한다. 실은 올해 공연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컸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다시 할 수 있을까였다. 지난 과정들을 돌이켜보면 참 행복했으나 그만큼 힘들기도 했다.

9월 초연, 11월 앵콜, 1월 앵콜, 그리고 광주공연에 이르기까지 6개월의 여정은 애초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60여명의 배우와 스탭들이, 지원금 한푼 없이, 예정에도 없던 앵콜을 반복하면서 공연을 이어갔다. 광주공연의 마지막 날, 쏟아진 폭설과 강추위는 화순팀의 마지막 관문 같았다.

우리는 다음에 다시 더 크게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올해 다시 올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 6개월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박수와 응원을 받았지만, 반면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몇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화순멤버들끼리 토론도 하고, 무기명 투표도 하고, 주변사람들의 의견도 물어보았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닌데 화순탄광사건 강연을 몇차례 다녔다. 뮤지컬 화순으로 인해 화순탄광사건이 조명되는 움직임을 종종 느끼는 일들도 있었다.

멤버들은 종종 올해 화순준비 언제 들어가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망설였다. 이전보다 좋은 조건을 마련해서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어디선가 기적처럼 좋은 소식이 들려왔으면 했지만, 마음뿐이었다.

다시 공연을 하기로 했다. 무슨 좋은 조건이 생긴 건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 맨주먹으로 시작한다. 맨땅에 헤딩한다. 따지고보면 맨주먹은 맞지만, 맨땅에 헤딩은 아니다. 지난 공연의 경험이 있다. 지난 공연을 함께 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멤버들이 있다. 지난 공연에 분에 넘치게 환호해주셨던 관객들도 있다. 그러니 맨 처음보다는 나을 것이다.

올해는 화순탄광사건 70주년이 되는 해다. 좀 커다란 극장을 알아보려고 했다. 앵콜을 거듭하며 점점 큰 극장으로 옮겨갔던 화순은 광주에서 너비 26m의 대극장 공연까지 해냈다. 이번에는 2배의 인원이다. 출연자만 100명. 극장을 알아보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그 대신,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넓은 광장으로 가는만큼, 걱정은 태산처럼 높다.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도 문제고,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연습실을 구하는 것도 큰 난관이다. 우리만의 자족적인 예술행동이 되지 않기 위해 홍보와 조직도 해야한다. 텅 빈 광장을 극장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겐 돈이 없다.

"그러나"가 아니라 굳이 "그리고"라고 적었다. 어떻게든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는 일이다. 9월 8일 목요일 밤 8시. 광화문 광장. 북쪽엔 청와대가 있고, 동쪽엔 미대사관이 있고, 서쪽엔 세종문화회관이 있고, 남쪽엔 세월호 농성장이 있다.

그 곳에서 100명의 배우들이 "우리의 조국은 우리를 구하지 않는다. 허나 이 비는 그치리라. 이 밤 이 고통 이 슬픔 모두 지나가리라. 내일은 꼭 오리라!"며 노래할 것이다. 있는 힘껏 노래할 것이다. 돈은 없어도 낭만은 있어야 한다. 그래. 다시 기억난다. 스탠딩 뮤지컬 화순의 주제는 "멋있게 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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